영화 [벌새] 김보라 감독의 삶

한 소녀의 내밀한 이야기이자 웅장한 대서사시가 도착했다. 시대의 재난도 사랑의 기쁨도 고통과 상실도 거기에 있다. 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에게 삶이란 무엇인지 물었다.

<벌새>는 1994년에 중학생이었던 은희의 성장담을 그려낸다. 남의 이야기지만 내 이야기 같다. 영화를 보며 마치 내가 체험한 유년처럼 느껴지는 기묘한 경험을 했다. 가장 구체적인 것이 가장 원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사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대학원 시절, 교수님이 “클리셰를 피하려면 구체적이면 된다”고 한 적이 있다. 이를테면, 그냥 꽃이 아니라 제라늄 꽃이라 불러라. 샹탈 애커만의 <잔느 딜망>의 원제에는 그가 사는 주소와 연도까지 붙는다. 그럼으로써 잔느 딜망은 한 여자가 아닌 그 시대에 거기 사는 사람이라는 구체성을 획득하는 거다. 평범한 이들의 삶을 세세하게 기록한 생애사와 구술사를 좋아한다. 엄청난 구체성 속에 보편적인 서사가 있고, 구체적으로 쓸수록 공동의 서사에 가닿는다.

자전적 이야기다.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관객의 좋은 평을 들으며 그 시절에 대한 어떤 긍정, 비로소 매듭을 짓는 기분을 느꼈을 것 같다. 자기 삶을 꺼내놓는다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이 영화를 만든 이유는 하나다. 내일 죽을 수도 있는데 거짓말하고 싶지 않다. 내 끝까지 내려가서, 본질을 드러내야 한다. 응답을 받은 것 같아 기쁘다.

꿀을 찾아 수천 번 날갯짓을 하는 벌새처럼 은희는 사랑을 갈구한다. 사람들의 원형적인 욕망은 같다. 단순하게 세상을 나누면 사랑과 사랑 아닌 것이 있다. 그런데 사랑받는다는 말은 절반이다. 은희는 사랑을 찾은 것이 아니라, 사랑받으려는 투쟁을 멈춘다. 사랑은 결국 자신에게서 나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받은 사랑을 남에게 나눠주는 것. 당신에게도 영지 선생 같은 존재가 있었나? 있었다. 우리를 인간으로 대접하는 데 친절하진 않은 사람이었다. 돌이켜보면 난 유리였던 적도, 지숙이였던 적도 있고, 누군가에겐 영지 선생인 적도 있었다. 많은 이가 그래왔을 거다. <벌새>는 모든 게 느리게 온다. 성수대교 사고도 후반부에야 나오더라. 리액션도 즉각적이지 않고, 이후의 궤적을 길게 좇는다. 그 호흡이 좋았다. 의도한 걸 예리하게 봐주셨다. 많은 사람이 이 영화에서 성수대교가 언제 무너지나 하면서 봤다더라. 우리는 언제나 공동의 환영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일상엔 언제나 공포가 도사리고 있다. 영화에서 계속 그런 불안이 느껴지길 바랐다. 은희는 폭력적인 오빠에게 고통받는다. 가부장제에서 자라난 동세대 여자들이 어떤 억눌린 상흔을 가졌는지를 그려냈다. 90년대에 아빠, 오빠한테 맞는 일은 비일비재했으니까. 해외 영화제 나가면 한국 사회가 이렇게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이냐고 묻곤 하는데, 백인 남성들은 아시아 국가를 타자화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질문에 구미를 맞춰주진 않았다. 폭력은 어디에나 있듯 내 안에도 가부장적인 여성 혐오가 체화된 부분이 있었고, 내부자로서 반성해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비정상이었는지를 환기하면서. 영지의 편지가 마음에 남는다. “다만 나쁜 일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불가항력의 재난과 고통, 그럼에도 기쁨과 사랑. 그 역설이 삶 같았다. 내가 투영한 인물은 은희지만, 어른이 돼서 하고 싶었던 말은 영지의 입으로 했다. 어릴 땐 모든 게 환영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삶이 비정한 동시에 아름답고, 불안과 공포만큼 사랑과 기쁨이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구호 같은 것이 아니다. 삶은 구체적이고 살아 숨 쉬는 것이다.

개봉 전, 작가 앨리슨 벡델과 만났다. 트라이베카 영화제에 갔을 때 벡델의 집을 찾아가 이틀간 함께 시간을 보냈다. 충만한 시간이었다. 페미니스트이자 자전적인 이야기를 한 여성 창작자로서 많은 공감을 나눴다. 곧 출간할 <벌새>의 시나리오집에 그와의 대담이 실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