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아이템으로 돌아온 앞치마, 그 속에 담긴 여성의 의미
할머니는 1932년생이었습니다. 평생 아무에게도 ‘집안의 여자’ 자리, 즉 살림을 책임지는 이의 자리를 한 번도 내준 적 없는 분이었죠. 딸, 며느리, 손녀 그 누구에게도요. 앞치마를 생각하면 늘 할머니가 떠오르는 이유입니다. 할머니는 늘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어요. 앞치마는 할머니를 집안 살림을 이끄는 수장이자 ‘여자 가장’으로 만들어주는 도구였습니다. 그런 앞치마가 다시 패션 아이템으로 돌아왔고, 논의의 중심에 섰습니다. 오늘날 앞치마는 여성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앞치마의 역사는 옷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습니다. 고대 이집트, 그리스, 로마에서도 사용한 흔적이 있을 정도로 역사가 길죠. 흔히 알고 있듯 처음 목적은 옷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고요. 단순한 기능적 의복이던 앞치마는 시간이 흐르며 ‘사회적 신분과 역할을 드러내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구두 수선공은 어둡고 튼튼한 것을, 식당 종업원은 가볍고 흰 것을, 할머니는 점심에 남은 얼룩이 티 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한 것을 선택했으니까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는 앞치마의 역사에서 꽤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때를 거치며 앞치마는 여성만의 전유물로 거듭났거든요. 좋은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전쟁에서 돌아온 남성들이 다시 노동시장을 주도하면서, 여성들은 일을 그만두고 가정으로 돌아가야 했죠. 공적인 영역에서 사적인 영역으로 밀려난 겁니다. 정확히 1950년대, ‘이상적인 여성’은 허리에 단정히 앞치마를 두른 채 늘 분주하게 집안일을 하는 완벽한 주부의 모습이었습니다.
옛날과 달리 현대 여성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사회생활을 하고, 커리어를 쌓고 있죠. 동시에 각종 살림이나 집안 대소사에 대한 기획, 육아 같은 사적인 영역 전반을 책임집니다. 커리어도, 사랑도, 자기 시간도, 아이도, 경제적 독립도, 모든 것을 이뤄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살면서 정작 기본적인 권리를 요구하는 데엔 조심스럽죠. ‘예민하다’거나 ‘욕심이 많다’는 부정적 시선이 이어지곤 하니까요.
현대 여성들은 여전히 앞치마를 두르고 있을까요? 소셜 미디어라는 타임머신은 우리를 종종 뜬금없는 시대로 데려갑니다. 최근 인스타그램과 틱톡에서는 ‘전통적인 아내(Tradwife)’라는 이름으로 묶인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주된 내용은 젊은 여성이 일을 그만두고 가정과 아이에 헌신하는 것이죠. 부드러운 목소리의 그녀들은 작은 프릴이 달린 파스텔 톤의 리넨 앞치마를 두른 채 집에서 조신하게 직접 버터를 만듭니다. 동시에 ‘남자를 행복하게 만드는 법’을 설파하죠. 1950년대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인 아내’ 콘텐츠의 대표적인 아이콘은 두 명입니다. 나라 스미스(Nara Smith)와 한나 닐먼(Hannah Neelman)이죠. 나라 스미스는 높은 광대뼈와 사슴 같은 눈을 가진 24세 모델로, 역시 모델인 남편 럭키 블루 스미스와 네 아이를 두고 있습니다. 그녀는 주로 꾸뛰르 드레스를 입고 주방에서 모차렐라 치즈 같은 걸 만드는 영상을 올립니다.
한나 닐먼은 농장에서 아이 여덟 명을 키우는 전직 발레리나입니다. 목가적인 풍경을 기대할 수 있지만, 닐먼의 콘텐츠는 그보다는 다소 논쟁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이슈가 된 영상을 예로 들어볼까요? 생일을 맞아 그리스 여행을 기대한 그녀에게 남편은 달걀을 모을 때 쓰라며 앞치마를 선물합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전통적 역할에 묶인 여성의 모습을 전시했다고 비판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유머일 뿐이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닐먼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고 있다며 논란을 일축했지만, 이런 콘텐츠를 둘러싼 논쟁은 개인의 선택 때문에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지속 불가능한 판타지’가 원인이죠.
통계를 볼까요? 성평등가족부와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발표한 ‘2025년 여성경제활동백서’에 따르면 여성 고용률은 54.7%로 남성 고용률 70.9%에 비해 떨어집니다. 관련 통계 집계 이후 남녀 고용률 격차를 가장 크게 줄인 수치라고 하지만, 여전히 16.2%포인트나 벌어져 있죠. 이런 상황에서 ‘행복은 집 안에 머물며 가정을 가꾸고 배우자의 수입에 의존하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아내 콘텐츠의 메시지가 재생산되는 건 썩 올바른 일은 아닙니다.
도시에 사는 우리에게 세상은 너무 정신없고 바쁘잖아요. 솔직히 말하면 저 역시 ‘전통적인 아내’ 같은 유의 영상을 보며 우아한 전원생활 풍경으로 힐링할 때가 있습니다. 가끔 창밖으로 그림 같은 초원이 펼쳐진 근사한 부엌에서 예쁜 옷을 입고 가족을 위해 빵을 굽는 이들을 보면 잠시 마음이 편안해지거든요. 하지만 그건 현실이 아닙니다. 엔터테인먼트죠. ‘전통적인 아내(#tradwife)’ 해시태그를 달고 있지만 나라 스미스와 한나 닐먼은 전통적인 아내가 아니에요. 그들은 디지털 기업의 CEO입니다. 그들이 생성하는 콘텐츠의 종류가 ‘집안일’이죠.
현실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는 아내가 되고 싶은 걸까요, 아니면 CEO가 되고 싶은 걸까요? 어떤 경우라도 우리가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답은 그 가운데 어딘가 있을 테고요. 미우치아 프라다도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던진 것 같습니다. 프라다는 미우미우의 여름 컬렉션 ‘일의 중요성’을 통해 앞치마를 주요 아이템으로 활용했죠. 꽃무늬 앞치마는 원피스가 되었고, 파란 면 앞치마는 공장 노동을 암시하며, 가죽 앞치마는 갑옷처럼 변했습니다. 영감의 원천은 사진집 <일하는 여성들(Women at Work)>입니다. 사진가 헬가 파리스가 1984년 동베를린 의류 공장에서 찍은 흑백사진을 모은 것으로, 여성 노동의 현실을 다큐멘터리처럼 담아낸 작업물입니다.
‘일의 중요성’은 이렇게 시작되는 동화 같습니다. “옛날 옛날에, 앞치마가 살았습니다…” 미우미우가 앞치마를 통해 쓰는 이 이야기는 ‘단일한 여성상’이 아니라 ‘복수의 여성상’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내면서 노동자이고, 웨이트리스면서 동시에 지식인입니다. 과거에는 앞치마가 여성을 정의했지만, 오늘날의 앞치마는 기능적일 수도 있고 꾸밈을 위한 수단일 수도 있으며 우리가 세상에 남기고 싶은 흔적을 표현하는 캔버스가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 <보그>와 스타벅스의 협업을 통해 공개된 앞치마처럼 말이에요.
현대 여성에게는 전통적인 역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정체성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부엌에 서 있는 여성조차 말이죠. 일단 저는 밤에 미우미우 앞치마를 입고 외출하는 여성이 많은 세상을 꿈꿉니다. 집안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패션을 위해 앞치마를 입는 여성이 늘어 앞치마가 지닌 상징을 깨뜨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 프라다가 앞치마를 소환한 이유도 아마 거기 있을 테니까요.
관련기사
-
뷰 포인트
일하고 사랑하고 때론 슬퍼하며 삶을 이어갈 여성들에게
2025.03.18by 류가영
-
뷰 포인트
모든 걸 잘해내겠다는 ‘완벽주의자의 욕심’이 결국 초래하는 것
2026.03.02by 김현유, Mónica Heras
-
뷰 포인트
자기만의 이야기를 지닌 모든 여성에게
2025.11.03by 류가영
-
뷰 포인트
밀레니얼 여성들이 ‘내가 예뻐진 그 여름’에 빠져든 이유
2025.09.12by 김현유, Olivia Petter
-
뷰 포인트
요즘은 남자 친구 있다는 게 부끄러운 일인가요?
2025.10.30by 황혜원, Chante Josep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