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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냉 트롱이 이어 쓰는 발망, ‘미니멀한 화려함’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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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말, 오뜨 꾸뛰르 쇼의 열기로 분주한 파리에서 안토냉 트롱(Antonin Tron)을 만났다. 연초에 이전한 발망(Balmain) 사무실이 이제 막 자리를 잡은 참이었다. 널찍한 방 안에는 장식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블랙 미니 드레스를 입은 마네킹이 구석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벨벳과 저지 소재로 정교하게 드레이핑한 드레스는 트롱 개인 브랜드 아틀레인(Atlein)과 닮아 있었다. 다음 날 공개할 새 컬렉션 샘플이라 짐작했지만, 1946년 피에르 발망이 제작한 아카이브였다. 무려 80년 세월을 착각한 셈이다.

발망 본사에서 포착한 안토냉 트롱.

흔히 ‘발망’ 하면 올리비에 루스테잉의 화려한 ‘발망 아미’나 2000년대 크리스토프 데카르넹이 이끌던 록 시크 전성기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 이면의 깊은 역사에 대해서는 의외로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1993년부터 10년간 하우스를 이끈 오스카 드 라 렌타 시절도 흐릿해졌을 정도다. 트롱은 바로 이 지점, 잊힌 발망의 뿌리를 찾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정의했다. “요즘 발망의 역사를 깊이 파고들고 있어요. 발망은 전쟁 직후인 1945년에 시작됐죠. 모든 것이 무너진 시기였는데도 꾸뛰르 하우스를 세워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이 그를 움직였습니다. 어머니가 결혼반지를 팔아 도울 정도였죠. 이런 이야기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트롱은 피에르 발망의 자서전 <나의 세월과 계절(My Years and Seasons)>을 탐독하며 하우스의 시작점을 복기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피에르 발망이 젊은 시절 뤼시앵 를롱(Lucien Lelong)에서 크리스챤 디올과 견습생으로 일했다는 점이다. 당시 두 사람은 뜻이 잘 맞아 브랜드를 같이 창업할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웠다. 만약 그 약속이 지켜졌다면 오늘날 패션사는 완전히 다른 이름을 기록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발망이 먼저 독립하며 두 사람의 공동 창업은 무산됐지만, 발망이 상징적인 하우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패션 황금기를 설계했다는 걸 보여준다.

발망 2026 가을/겨울 시즌을 위한 드레스 마네킹과 패턴.

발망은 트롱에게 알맞게 찾아온 기회다. 올해 마흔한 살인 그는 지난 10년 동안 독립 브랜드 아틀레인을 운영해왔다. 몸에 밀착돼 흐르는 실루엣이 특징이다. “마담 그레(Madame Grès)가 티셔츠를 만든 느낌이죠.” 마담 그레는 천을 조각처럼 접어 몸에 감싸는 드레이핑 드레스로 유명한 꾸뛰리에다. 트롱은 그 조각 같은 드레이핑 감각을 가볍고 현대적인 형태로 풀어냈다. 이런 실루엣은 최근 몇 년간 패션계를 지배했던 ‘조용한 럭셔리’ 흐름에 대한 가장 섹시한 반대표다. 이미 발렌시아가에서 니콜라 제스키에르, 알렉산더 왕, 뎀나와 호흡을 맞추고 생 로랑에서 안토니 바카렐로와 함께했기에 파리 거대 하우스의 메커니즘 역시 잘 이해하고 있다.

트롱은 발망의 정체성을 ‘당당하고 강렬한 글래머’에서 찾는다. 과거 할리우드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브랜드라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브리지트 바르도가 영화 <그리고 신은 여자를 창조했다(Et Dieu… Créa la Femme)>(1956)에서 입었던 드레스, 소피아 로렌과 마를렌 디트리히, 에바 가드너와 조세핀 베이커가 사랑했던 옷이 모두 발망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발망 재고실에 있는 원단 롤.
어깨 패드는 신상 컬렉션에서 거듭 등장한 모티브다.

유럽의 역동적인 고객층도 트롱의 영감이 되었다. 특히 발망 고객이었던 에어프랑스의 첫 여성 파일럿에 집중했다. 이번 쇼 오프닝을 장식할 광택 있는 블랙 레더 재킷은 그녀에 대한 헌사다. 1940년대풍의 넓은 어깨와 잘록한 허리, 페플럼 밑단이 조화를 이룬 룩은 속도감 있고 관능적인 현대 여성의 모습을 대변한다. 지난해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건축가 안드레아 파라구나(Andrea Faraguna)가 설계한 ‘흡사 버려진 집 같지만, 완전히 그렇지는 않은’ 몽환적인 쇼 공간 역시 이 같은 미학을 극대화한다.

트롱은 발망이라는 브랜드를 ’80년 된 집’에 비유한다. “오래된 집에는 유령이 많기 마련이죠. 발망이 어때야 한다는 수많은 유령을 밀어내기보다 그들과 함께 살아가길 택했습니다. 아틀레인에서는 아이폰으로 영화를 찍는 감독 같았다면, 이제 자수와 테일러링이라는 기술과 거대 자본을 가진 감독이 된 기분이에요. 리들리 스콧까진 아니더라도요.”

“요즘 발망의 역사를 깊이 파고들고 있어요.” 안토냉 트롱은 발망의 상징적인 디자인에 집중한다.

‘미니멀한 화려함’으로 발망은 다시 시작한다. 상징적인 레오파드 패턴을 사용하되 화려한 장식 대신 정교한 자수와 지퍼 여밈이 있는 간결한 재킷으로 풀어내는 식이다. 액세서리 역시 마찬가지다. 액세서리는 트롱에게 비교적 새로운 영역이지만, 발망 역시 성장 가능성이 큰 분야다. 발망은 21세기에 가죽 제품이 아니라 기성복으로 주목받아왔기 때문이다. “액세서리는 대부분 차갑고 딱딱한 느낌이 들어요. 저는 발망다운 관능적인 뭔가를 원합니다. 섹시하고 고급스러우면서도 진정한 관능미를 담은 그런 뭔가를요.” 트롱은 기존 럭셔리 백에서 벗어나 서핑에서 사용하는 드라이 백의 구조를 빌렸다.

데뷔 쇼가 끝나면 트롱은 스리랑카로 서핑 여행을 떠난다. “친구들과 다 같이 모여요. 아주 느긋하고 편안한 시간이죠.” 느긋한 휴식이 끝나면 파리로 돌아와 발망이라는 강력한 엔진에 다시 시동을 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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