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하는 경험은 사람을 신중하게 만드니까” 백컨트리 스노보더 조성우
스노보더 조성우는 슬로프 밖의 설산을 누빈다. 오늘도 신중하게 골라낸 순간을 흠뻑 살아간다.
피곤하겠어요. 오늘 나가노에서 니가타까지 이동하고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통화 나누는 것인데요.
괜찮아요. 겨울인걸요.
스노보더에게 겨울은 어쩔 수 없이 분주한 계절이군요.
올해로 31년을 꽉 채워 스노보드를 탔어요. 그중 20년은 선수 생활을 했고요. 지금은 ‘랑조’라는 스노보드 투어 회사를 운영하며, 방송 해설도 하고 있습니다. 근 10년 동안은 스키장 슬로프가 아닌 자연 그대로의 산에서 보드를 타는 ‘백컨트리’, ‘파우더’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리조트에서 스노보드를 타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백컨트리 종목을 어떻게 시작했나요?
울릉도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에서는 법적으로 백컨트리 보드를 탈 수 있는 곳이 없어요. 저도 원래는 프리스타일 종목 선수로 인공 구조물에서 회전하고 점프하며 훈련했고요. 제 백컨트리 시작은 아마 25년 전쯤 캐나다였을 거예요. 같이 보드 타던 친구들을 따라 슬로프 밖으로 나갔어요. 일본, 러시아, 유럽, 북미 이런 해외 국가에서는 산과 리조트의 경계가 크게 없어요. 원한다면 언제든 산 곳곳을 누빌 수 있어요.
첫 백컨트리 경험이 기억나나요?
그냥 힘들다는 느낌만 있었어요. 리조트는 정설이 돼 있어서 눈이 단단한데, 백컨트리는 자연설 그대로잖아요. 가슴까지 눈이 쌓여 발이 푹푹 빠지는 곳에 준비도 없이 들어갔다가 고생했죠.
그 일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네요.
저도 이럴 줄 몰랐어요. 선수 생활을 마치고 30대 중반 정도 되니까 백컨트리가 다시 생각이 났어요. 리조트 안에서 보드를 타는 대신 자연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온전히 순간을 누리는 쪽을 추구하게 되더라고요. 속도가 조금 느리더라도요.
리조트는 가이드라인이 있는데, 백컨트리는 없잖아요. 안전에 대한 판단을 스스로 하는 일이 어려울 것 같아요.
리조트는 정해진 슬로프와, 안전 요원, 몸을 피할 건물이 있지만, 백컨트리는 야생에 노출된 상태예요. 안전을 판단하기 위해 날씨를 집요하게 봅니다. 기온, 적설량, 바람의 방향은 물론 햇볕의 양까지 샅샅이 살펴요.
햇볕의 양을 보는군요.
그럼요. 볕은 눈의 성질을 즉각적으로 바꿔요. 보드를 타기 가장 좋은 상태의 눈도 순간적으로 표면이 녹으면 무거워져요. 그건 곧 부상과 연결되고요. 날씨는 체온 관리에도 중요합니다. 해가 안 드는 날은 보온 의류를 그만큼 가방에 더 챙겨야 해요. 가민 같은 GPS 장비는 늘 챙겨요. 현 위치와 고도에 맞는 일기 예보도 받을 수 있고 조난 신호 장비도 되고요.
투어가 아닐 때는 혼자서도 타는 것 같던데, 무섭진 않나요?
루트를 찾을 땐 주로 혼자인데 늘 무서워요. 보드를 타기 전에 부츠 바인딩을 강하게 조인 다음 발가락을 흔들어보는 습관이 있어요. 발가락이 꼼짝하지 않는 걸 확인하고서야 출발해요.
백컨트리에서는 장비의 선택 또한 중요하겠어요.
절대 가볍게 고르지 않습니다. 아주 신중하게 골라요. 장갑 한 짝도 생명을 지키는 중요한 장비니까요. 제 기준은 간단합니다. 브랜드의 가장 기본이 되는 모델, 스테디셀러, 가장 여러 환경에서 많은 사람에게 테스트 된 바 있는 제품. 거기서 시작합니다. 데이터가 많고, 수선도 쉽다는 거니까요.
실제로 사용하는 제품을 몇 가지 소개해 주세요.
보온을 위한 인슐레이터의 경우 아크테릭스 아톰과 프로톤을 병행해서 사용하고요. 방수를 위한 셸의 경우 스노스포츠를 위한 세이버 제품들을 사용합니다. 백팩은 알파 SL을 사용하는데, 초경량이면서 내구성도 좋아요. 아크테릭스 알파 SV는 제게 정말 빼놓을 수 없는 제품이에요. 제일 유명하기도 하고 제가 가장 좋아하기도 해요. 이 재킷은 그 자체로 방패고 생명을 지키는 중요한 장비예요.
이 아이템이 없었으면 위험했겠다 하는 순간도 있어요?
적설량 1m가 기본인 곳에서 매일 스노보드를 타요. 아침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눈을 맞으며 설산에서 뒹굴다 보면 방수 제품도 젖게 되어 있는데, 그러면 체온이 떨어져서 위험해요. 알파 SV는 완전 방수가 되기 때문에 여러 번 절 살렸죠.
자연에서 보드를 타는 순간에는 어떤 감각이 가장 곤두서나요?
아무래도 시야죠. 0.1초 안에 지형을 읽고 판단해서 움직여야 하니까 눈앞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게 돼요. 자기 숨소리와 맥박도 크게 느껴지고요. 집중력과 판단력을 말 그대로 쏟아붓습니다.
보딩 장면을 액션캠으로 일인칭 촬영한 걸 봤는데요. 제가 다 숨을 멈추고 긴장하게 되더라고요.
저도 매 순간 긴장해요. 정말 목숨을 걸고 하는 거거든요. 어디까지 무리해도 되는지, 언제 멈춰야 하는지, 뭘 가져가고, 가져가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지죠. 제게는 이제 가족과 아이도 있으니까요. 위험한 작업이지만, 백컨트리 루트를 만드는 의미 있는 작업이기도 해요.
산에서의 몰입이 삶에도 영향을 미치나요?
확실히 그래요. 몰입하는 경험은 사람을 신중하게 만드니까요. 불필요한 선택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 뭐랄까, 순간을 살게 되고 선택이 심플해집니다.
예를 들면요?
하프파이프 선수로도 물론 순간에 집중하고 신중하게 선택했지만, 지금에 비하면 막무가내 수준이었어요. 한계에 맞서 빠르게 타기 위해 나만 믿고 무모하게 굴었죠. 지금은 달라요. 내 컨디션과 별개로 자연환경이 준비되지 않으면 보드를 탈 수 없거든요. 자연이 멈추라고 하면 멈추고, 허락하면 움직여요. 단순하죠.
이 인터뷰를 통해 백컨트리 보드를 시도해 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 같아요. 조언 한마디 남겨주세요.
보드를 이미 잘 탄다고 해도, 바로 장비부터 챙겨서 자연으로 들어가진 마세요. 눈 덮인 산을 걷는 것부터 시작하세요. 설산을 하이킹하는 것부터 이미 백컨트리입니다. 겨울, 그중에서도 설산은 다른 계절의 산과 완전히 달라요. 많은 사람이 경험해 봤으면 좋겠네요.
설산의 무엇에 그렇게 매료됐나요?
그 감동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떠오르는 장면을 말해볼게요. 상고대라고 나무가 통째로 얼어붙는데, 수목한계선인 해발 1,700m 전후로 볼 수 있어요. 그 아래로는 온도가 높아서 서리가 생기지 않고, 그 위로는 나무가 없고요. 볕에서 몇 분 만에 다 녹아버리는 얕은 서리라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만 볼 수 있어요. 봄에 피는 꽃봉오리보다 제겐 더 귀한 장면이에요. 대관령이나 능경봉 같은 근처 강원도 산에서 그 감동을 느낀 다음 천천히 백컨트리 스키나 보드로 가도 늦지 않습니다.
설산을 향한 애정이 느껴지네요. 자연은 조성우에게 어떤 존재인가요?
모를 때는 ‘자연에 맞선다’, ‘산을 정복했다’ 이런 단어가 대수롭지 않았어요. 미디어에서 쉽게 접하기도 했고, 저 역시 높은 산을 힘들게 걸어 올라가서 스노보드를 타고 내려오면 ‘이 산을 정복했다’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지금은 알아요. 자연에 맞서는 사람은 뭘 모르는 사람이에요. 좀 세게 말하면 무식한 사람이고요.
그럼, 지금은 어떤 표현을 사용하고 싶은가요?
지금의 저는 자연 안에서 일하는 사람이에요. 자연이 주는 대로 합니다. 아웃도어 활동을 경험하고 알수록 인간은 자연 앞에 숙연해져요. 산악인의 중요한 신조 중 하나가 멈출 줄 아는 거예요. 멈출 줄 아는 사람이 오래 남습니다.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는 감각이 제일 중요해요. 전 그걸 배우는 데 30년이 걸렸습니다.
자연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필요하면 멈춥니다. 결과보다 중요한 건 순간의 선택이에요. 빨리 하려고 서두르지 마세요. 자연은 늘 그 자리에 있으니까 다시 준비해서 돌아와 다음 단계를 향해 나아가도 됩니다. 다 때가 있어요. 삶의 3/4을 눈 속에서 살아온 저도 마찬가지예요. 기다렸다가 때가 오면 순간을 흠뻑 살아갈 뿐입니다. 지금의 저를 만든 건 속도와 결과가 아니예요. 오히려 (좋은 눈을) 기다린 시간과, 포기하기로 한 결정, ‘여기까지’라고 선을 그은 순간들이 쌓여 지금의 과정이 된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