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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어떻게 그림 위에 압축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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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정말 많은 예술가가 있다’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저는 어쩐지 경이롭습니다. 만나본 적도 없는 그 예술가 한 명 한 명의 존재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는, 그리고 지금의 문화 예술이 있게끔 했다는 낭만적인 생각이 들거든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에서 한운성 컬렉션 기증 기획전 <그림과 현실>전을 둘러보면서도 저는 페어장에서만 새로운 작가를 만날 수 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운성이라는 작가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저에게 1946년생인, 산수(傘壽)의 연배인 이 작가야말로 그 어떤 신인 예술가보다 훨씬 신선하고 놀라운 존재로 다가오더군요. 과거는 과거에 빚지고, 그 과거는 또 그 과거에서 이어진다는 진실을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해녀’, 1964, 종이에 리놀륨 판화, 45×53.5cm.

이번 전시는 작가가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195점의 판화 컬렉션과 미술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운성 작가는 현실을 탐구한 예술가, 기법을 집요하게 연구한 실험자, 그리고 후학을 길러낸 교육자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는 회화, 판화, 디지털 드로잉 작업 등을 통해 시대의 기술과 시각 환경의 변화를 수용하고 탐구해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운성이 판화 작업에 매진했다는 사실은 꽤 흥미롭습니다. “현실을 어떻게 이미지로 남길 것인가”라는 예술적 화두는 판화의 본래 방식, 즉 무언가를 새기고 이를 찍어내야 하는 속성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이미지는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걸까요, 완전히 반대되는 걸까요. 그리고 현실을 이미지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단단한 무언가에 힘겹게 형상을 새겨 넣듯 고단하고 힘든 일이 아니었을까요.

‘네 개의 감’, 1998, 종이에 석판화, 100×70.5cm.

‘능소화’, 2023, 종이에 아이패드 드로잉 프린트, 91×61cm.

한운성의 작품은 1960~1970년대 작품조차 세월의 간극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현대적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영감받은 작업 ‘변신’, 고대 그리스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테베 3부작’ 중 <안티고네>를 차용한 ‘안티고네’, 그리고 목판으로 제작했던 ‘황소’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재현한 ‘붉은 코의 황소’ 등은 추상과 구상을 자유롭게 넘나듭니다. 고대 그리스 및 로마의 폐허가 된 신전에서 받은 인상에서 출발한 ‘지혜의 기둥’은 은유적이고, T. S. 엘리엇의 시 ‘황무지’를 옮겨놓은 ‘황무지 Ⅰ’은 문학적입니다. 특히 길거리에 버려진 납작한 코카콜라 캔을 현대사회의 현실을 대변하는 상징물로 삼은 ‘욕심 많은 거인’은 거대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를 담고 있는데요. 석판화로 캔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기 때문인지, 그 이미지의 힘은 촉각적이라 할 만큼 강렬합니다.

‘욕심 많은 거인’, 1974, 종이에 석판화, 75×56cm.

좋은 예술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아마도 모든 예술가가 스스로 나이 듦에 구애받지 않거나, 나이와는 상관없이, 언제까지나 정신만은 생생하게 유지하기 때문일 겁니다. 한운성은 길거리의 고장 난 신호들을 보고서도 현대사회의 일면을 떠올려 작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술가가 세상의 일원으로 살면서도 자신을 끊임없이 이방인의 상태로 두려는 이유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익숙하지 않게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에게 살아 있다는 건 바로 ‘낯설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하는 일 아닐까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는 예술가에게만 적용되는 건 아닌 듯합니다. 한운성 작가의 작품 앞에서 요즈음 익숙한 시선으로, 뻔한 생각으로 놓쳐버린 보석 같은 순간이 얼마나 숱했는지 돌아보는 저 자신을 발견했으니까요.

‘DL 2017-IX’, 2017, 캔버스에 유채, 112×162.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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